중국 초기 도시 문명을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이 먼저 황허를 떠올립니다. 황허 중원에서 왕조가 등장했고, 이후 중국 정치사의 중심도 오랫동안 북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을 기원전 3000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오늘날 저장성 항저우 일대, 장강 하류와 타이후 주변의 습지에서는 이미 거대한 토목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물길을 바꾸고 둑을 쌓았으며, 높은 인공 대지를 만들고 그 위에 중요한 건축물을 세웠습니다. 어떤 무덤에는 일반인의 생활용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옥기가 가득 들어갔습니다.
이곳이 바로 량주 고성(良渚古城, Liangzhu Ancient City)입니다.
량주의 진짜 흥미로운 점은 단순히 오래됐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자 기록이 등장하기 훨씬 전에 이미 벼농사·수리 시설·도시계획·전문 장인·사회계층·종교적 상징체계가 서로 연결된 복합사회가 장강 하류에 만들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UNESCO 역시 량주 유적을 후기 신석기시대의 초기 지역국가와 초기 도시문명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합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집니다.
왜 중국 초기의 복잡한 도시 문명은 장강 하류의 물 많은 습지에서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량주 고성은 언제 등장했을까
량주 문화는 대략 기원전 3300년부터 기원전 2300년 사이 장강 하류에서 번성했습니다.
하지만 량주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장강 하류에서는 그 이전부터 마자방 문화와 쑹쩌 문화가 이어졌습니다. 연구에서 대략 마자방 문화는 기원전 5000~4000년, 쑹쩌 문화는 기원전 4000~3300년, 그 뒤를 량주 문화가 계승한 것으로 구분합니다. 즉 량주 고성은 최소 수백 년, 넓게 보면 수천 년 동안 축적된 장강 하류 정착생활과 농경문화가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 시기 | 장강 하류 문화 | 주요 특징 |
|---|---|---|
| 기원전 5000~4000년 | 마자방 문화 | 정착생활과 농경 확대 |
| 기원전 4000~3300년 | 쑹쩌 문화 | 사회 분화와 농업 발전 |
| 기원전 3300~2300년 | 량주 문화 | 도시화·수리시설·옥기문화·계층사회 |
이 흐름을 놓치면 량주를 갑자기 나타난 신비한 문명처럼 보게 됩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량주의 도시문명은 장강 하류 사람들이 오랫동안 물과 논을 다루면서 쌓은 기술과 조직력이 한 단계 더 커진 결과에 가깝습니다.
장강 하류에는 이미 강력한 벼농사 기반이 있었다
량주 문명을 이해할 때 가장 먼저 봐야 할 것은 옥기도 성벽도 아닙니다.
쌀입니다.
장강 중·하류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오래된 벼 재배 지역 가운데 하나입니다. 장강 하류에서는 량주보다 훨씬 이전부터 벼를 재배하고 논을 관리했던 흔적이 확인됩니다. 최근 연구에서도 장강 하류에서 약 6700년 전까지 올라가는 대규모 논 유적과 수문환경 변화에 맞춰 논의 형태가 발전한 사례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벼농사의 중요성은 단순히 사람들이 쌀을 먹었다는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벼농사는 물을 필요로 합니다.
물을 확보하려면 수로가 필요하고, 너무 많은 물이 들어오면 배수해야 합니다. 논의 경계를 만들고 파종과 수확 시기를 맞춰야 하며, 수확한 곡물을 저장해야 합니다.
농업 생산량이 커지면 저장시설을 관리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결국 물 관리 → 농경 생산 → 잉여 식량 → 인구 증가 → 노동력 동원 → 정치적 조직화라는 연결고리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량주가 바로 이런 구조를 보여줍니다.
UNESCO가 량주의 경제적 기반을 명확하게 벼농사에 기반한 지역국가로 설명하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습지는 약점이 아니라 량주의 경쟁력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물이 많은 저지대에 도시를 만드는 것은 꽤 이상해 보입니다.
비가 많이 오면 물에 잠깁니다.
지반도 약합니다.
강과 늪이 많아 건축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물은 량주의 가장 큰 자원이기도 했습니다.
장강 삼각주는 강과 호수, 습지와 평지가 복잡하게 연결된 곳이었습니다. 물은 농업용수였고, 동시에 사람과 물자를 운반하는 교통망이 될 수 있었습니다.
량주 지역의 환경 연구를 보면 도시가 자리 잡은 곳은 산과 수계가 만나는 곳으로, 담수와 목재 같은 자원에 접근하기 좋았고 당시 해안 환경 변화 속에서 벼농사를 확대하기에도 유리한 조건이 형성됐습니다.
즉 량주 사람들이 물을 피해 도시를 만든 것이 아니라,
물을 통제하면서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거대한 수리 시스템은 량주 고성의 핵심이었다
량주 문명을 단번에 도시문명의 단계로 끌어올려 보여주는 것이 바로 수리 시스템(hydraulic system)입니다.
량주 주변에서는 높은 댐, 낮은 댐, 제방, 수로와 같은 대규모 수리 시설이 발견됐습니다.
2017년 발표된 연구에서는 량주 주변의 댐과 제방·수로 체계가 약 5100년 전까지 올라가며, 당시 기준으로 세계적으로도 매우 이른 대규모 수리 토목사업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제시됐습니다. 연구진은 약 300헥타르 규모의 관련 시설과 대규모 토사 이동을 분석하면서 공사에 상당한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댐 하나가 아닙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막고,
필요할 때 물을 저장하고,
농경지에 공급하고,
홍수 위험을 줄이며,
수로를 통해 도시 내부와 주변 지역을 연결하는 하나의 시스템이었다는 점입니다.
UNESCO 세계유산 평가에서도 도시 유적과 함께 주변 수리체계가 량주 문명의 핵심 구성요소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줄팁
량주 고성을 이해할 때는 ‘성벽이 있는 도시’보다 ‘물을 관리하도록 설계된 도시’라고 생각하면 전체 구조가 훨씬 쉽게 보입니다.
최근 연구가 보여준 놀라운 건축 기술
량주 사람들이 습지 위에 어떻게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는지도 흥미롭습니다.
2024년 량주의 건축기술과 노동조직을 연구한 논문에서는 풀로 감싼 점토 덩어리(grass-wrapped clay blocks)를 활용한 공법이 분석됐습니다.
일종의 선사시대 토목 블록인 셈입니다.
연구진의 실험에 따르면 일정한 크기의 점토 블록은 습한 환경에서 배수와 내구성을 높이는 데 유리했고, 몇 명 규모의 소규모 작업조가 제작과 운반·시공을 효율적으로 분담했을 가능성이 제기됐습니다.
2026년 발표된 지질고고학 연구에서도 량주의 인공 대지와 수로 건설이 서로 분리된 공사가 아니라 수변 환경 전체를 재설계하는 통합된 토목 시스템이었을 가능성이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됐습니다. 연구는 이런 규모의 공사가 상당한 노동조직과 자원 관리 능력을 필요로 했다고 평가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거대한 국가가 수천 명을 일률적으로 지휘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최근 연구에서는 전체적인 도시계획과 자원 동원이 존재하면서도 실제 공사 현장에서는 3~4명 정도의 작은 작업 단위가 유연하게 움직였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고대 사회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한 명의 권력자 명령에 따라 일렬로 움직였다고 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코리의 중간생각
량주를 보다 보면 저는 오히려 ‘물이 많은 곳에서 어떻게 문명이 생겼을까’라는 질문 자체를 조금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이 많았기 때문에 어려웠던 것은 맞지만, 그 어려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더 큰 조직이 필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혼자서는 둑을 만들 수 없고, 한 가족만으로 수로를 관리하기도 어렵습니다.
결국 자연환경의 불편함이 사람들을 협력하게 만들고, 그 협력이 다시 권력과 조직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량주의 발전은 좋은 자연환경에 사람이 순응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 자연환경을 조직적으로 바꾸면서 사회 자체도 함께 변한 과정으로 보는 편이 더 흥미롭습니다.
옥기는 장식품이 아니라 권력이었다
량주 하면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옥종(玉琮, jade cong)과 옥벽(玉璧, jade bi)입니다.
옥종은 바깥쪽은 네모나고 내부에는 원형 구멍이 뚫린 독특한 형태의 옥기입니다.
옥벽은 가운데 구멍이 있는 원반 형태입니다.
문제는 옥이 매우 다루기 어려운 재료라는 것입니다.
금속 칼로 슥슥 깎아서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연마재를 이용해 자르고 갈고 뚫고 오랜 시간 표면을 다듬어야 했습니다.
량주 옥종에는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눈과 얼굴 형태의 문양도 등장합니다.
이렇게 많은 시간과 숙련 노동력이 필요한 물건이 일반적인 생활도구일 가능성은 낮습니다.
실제로 고급 무덤에서는 많은 양의 옥기가 출토되는 반면 일반 무덤과는 부장품에서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Met와 British Museum 역시 량주 옥종과 옥벽을 의례·부·신분과 관련된 물건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다만 당시 문자 기록이 없기 때문에 옥종의 정확한 종교적 의미를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부분이 정말 중요합니다.
권력은 성벽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옥의 원료를 확보했는가.
누가 장인을 조직했는가.
누가 수백 시간의 노동력이 투입된 물건을 소유했는가.
누가 죽은 뒤에도 이런 옥기를 무덤에 가지고 들어갔는가.
이 질문을 따라가면 량주의 사회계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판산 묘지가 보여주는 량주의 계급사회
량주 고성과 함께 중요한 곳이 판산(反山·Fanshan) 고급 묘지입니다.
량주의 상위 계층 무덤에서는 옥종, 옥벽, 옥월 등 많은 고급 옥기가 발견됐습니다.
반면 모든 량주 사람이 같은 양의 옥기를 가지고 묻힌 것은 아닙니다.
무덤 규모와 부장품에서 차이가 크다는 것은 사회 내부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사회적 계층화(social stratification)가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UNESCO도 량주의 사회 구조를 설명하면서 묘지의 차등화와 옥기 부장품을 사회적 위계를 보여주는 핵심 증거로 평가합니다.
따라서 량주는 단순한 대형 농촌마을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농민이 있고,
수리시설을 관리하는 집단이 있고,
장인이 있고,
대형 공사를 조정하는 조직이 있으며,
의례와 옥기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상위 집단까지 존재했던 사회로 볼 수 있습니다.
도시의 중심에는 모자오산이 있었다
량주 도시 구조에서 핵심적인 공간으로 거론되는 곳이 모자오산(莫角山·Mojiaoshan)입니다.
이곳에는 거대한 인공 대지가 조성되었습니다.
자연 언덕에 건물을 몇 채 올린 정도가 아니라 많은 흙을 이동시켜 높은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UNESCO 관련 평가 자료에서는 특히 기원전 3000~2850년 무렵 수리 시스템과 모자오산 대지, 수로, 주변의 고지대 정착지, 판산 고급 묘지 등이 발전하면서 도시의 기능적 구획이 분명해졌다고 설명합니다.
이걸 현대 도시와 완전히 동일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공간마다 역할이 달랐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권력과 의례의 공간,
주거지역,
묘지,
수로,
농경지,
수리시설이 하나의 도시권 안에서 서로 연결됐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량주를 단순한 신석기 취락이 아니라 초기 도시화(proto-urbanization)와 초기 지역국가 형성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황허가 아니라 장강 하류였을까
여기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고대 왕조는 황허 유역에서 발전했는데, 왜 이처럼 이른 시기에 장강 하류에서 고도로 조직된 도시사회가 나타났을까요?
정답을 하나만 고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여러 조건이 동시에 겹쳤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1. 오래 축적된 벼농사 기술
장강 하류에서는 량주 이전부터 오랜 기간 벼 재배와 논 관리 경험이 축적됐습니다.
량주는 그 기반 위에서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습니다.
2. 풍부한 수로 교통
강과 습지는 장애물이면서 동시에 도로였습니다.
배를 이용하면 무거운 곡물이나 목재·점토 같은 물자를 육상보다 효율적으로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3. 수리시설의 필요성
홍수와 습지 환경은 지속적인 공동 노동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많은 인구와 노동력을 조정하는 사회조직이 성장할 조건이 되었습니다.
4. 잉여생산과 전문화
농업 생산이 안정되고 잉여가 발생하면 모든 사람이 식량 생산에 종사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옥기 장인이나 건설 기술자 같은 전문집단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5. 의례와 권력의 결합
희귀하고 제작하기 어려운 옥기는 상위집단의 신분과 의례적 권위를 표현하는 강력한 수단이 됐습니다.
이 조건들이 연결되면서 장강 하류에서는 단순한 농경사회보다 훨씬 복잡한 사회가 성장했습니다.
그렇다고 량주가 중국 문명의 ‘유일한 시작’은 아니다
여기서는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량주가 중요하다고 해서 중국 문명이 모두 량주에서 시작됐다고 쓰면 오히려 지나친 단순화가 됩니다.
신석기시대 중국에는 황허뿐 아니라 장강 중류와 하류, 산둥, 요하 유역 등 여러 지역에서 서로 다른 복합사회가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황허 유역에는 양사오와 이후 룽산 계열 문화가 있었고, 다른 지역에서도 독자적인 의례와 농경·도시화가 진행됐습니다. 이런 여러 지역 문화 사이에는 교류도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 선사시대를 바라볼 때는 하나의 중심에서 문명이 탄생해 주변으로 퍼졌다는 단순한 구조보다 여러 지역 중심이 성장하고 경쟁·교류하면서 후대 중국 문명의 기반을 만들었다는 관점이 더 유용합니다.
량주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장강 하류 역시 중국 문명 형성의 주변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아주 강력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실사례|옥벽 42점이 발견된 무덤이 의미하는 것
량주의 사회구조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무덤입니다.
British Museum 자료에는 저장성 위항의 판산 M20 무덤에서 42점의 옥벽이 확인됐다는 사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장쑤 우진 쓰둔의 M3 무덤에서도 24점이 확인됐습니다.
여기서 숫자 자체보다 중요한 건 제작비용입니다.
옥기 하나를 만드는 데도 원료와 전문 기술,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 물건을 수십 점씩 무덤에 넣었다는 것은 해당 인물이 생전에 상당한 경제적·의례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과 함께 귀중한 옥기를 묻어버릴 수 있었다는 사실 역시 그 사회가 상당한 잉여자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고고학에서는 무덤을 단순히 죽은 사람을 묻은 장소로 보지 않습니다.
무덤은 살아 있던 사회의 계급과 권력구조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물을 지배한 문명은 결국 물 때문에 흔들렸을까
량주 문화는 기원전 2300년 전후를 지나며 급격하게 약화됩니다.
여기에는 여러 설명이 있습니다.
기후 변화,
대규모 홍수,
해수면 변화와 해안 침수,
사회 내부의 변화 등이 후보로 제시돼 왔습니다.
일부 퇴적층 연구에서는 기원전 3천년대 후반 량주 지역에서 해수면 상승과 연관된 단계적인 해안 침수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런 환경변화가 량주 문화의 쇠퇴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다른 고기후 연구에서는 약 4300~4000년 전 장강 유역에서 강수량이 증가하고 홍수가 빈번해진 시기가 확인됩니다.
하지만 “한 번의 대홍수 때문에 량주 문명이 하루아침에 멸망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량주의 쇠퇴와 기후변화 사이의 인과관계는 여전히 논쟁이 있습니다. 일부 연구는 물과 관련된 재난을 강조하지만, 다른 연구는 량주 사회의 약화가 그보다 앞서 시작됐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량주는 물을 활용해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수리시설에 크게 의존하는 복잡한 사회일수록 환경조건이 일정한 한계를 넘어 변하면 유지비용도 커질 수 있습니다.
성공을 만들어낸 시스템 자체가 환경이 바뀌었을 때 취약점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량주 고성이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이유
량주 유적은 2019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하지만 세계유산이라는 명칭보다 더 중요한 것은 량주가 중국 문명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꿨다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중국 문명사를 황허와 중원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량주는 그보다 훨씬 복잡한 그림을 보여줍니다.
약 5000년 전 장강 하류에서도 이미 대규모 수리시설과 도시계획이 존재했습니다.
벼농사는 단순한 생계수단을 넘어 많은 인구를 부양했고,
대규모 토목공사는 노동력을 조직했으며,
옥기는 사회적 권력과 의례를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도시권 안에서 연결됐습니다.
그래서 량주를 이해하면 중국 문명의 시작이 한 줄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황허와 장강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복잡한 사회가 동시에 성장한 다중 중심적 과정이었다는 사실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량주 고성의 발전을 보면 중국 문명의 시작이 어느 한 지역에서 단선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장강 하류에서 량주 문화가 벼농사와 수리 기술을 바탕으로 복잡한 도시사회를 만들어가는 동안, 황하 유역에서도 정착 농경과 촌락의 확대, 사회적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양사오 문화와 룽산 문화는 황하 문명이 형성되기 이전의 사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 복잡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계입니다. 이런 흐름을 함께 살펴보면, 「중국 선사 인류 정착과 황하 문명 기원: 양사오·룽산 문화로 읽는 신석기 혁명」 을 통해 중국 문명이 황하와 장강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농경사회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성장하고 교류하면서 형성되었다는 큰 그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코리의 생각
량주 고성을 공부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거대한 옥종도, 성벽도 아닙니다.
저는 결국 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강 하류의 물은 사람들에게 벼농사를 가능하게 해줬지만 동시에 홍수와 습지라는 문제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로를 만들고, 댐을 쌓고, 높은 땅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대규모 작업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사람을 조직하는 정치체계가 필요해졌을 것입니다.
농업은 인구를 키웠고,
물 관리는 조직을 키웠으며,
잉여 생산은 전문 장인을 만들고,
옥기는 그 사회에서 누가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줬습니다.
량주 문명이 장강 하류에서 성장한 이유를 하나로 줄이면 결국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비옥한 환경이 문명을 자동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장강 하류 사람들이 어려운 물 환경을 수천 년 동안 관리하면서 농업·기술·권력을 하나의 체계로 연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량주 고성은 중국의 오래된 유적 하나가 아니라, 도시는 어떻게 탄생하고 복잡한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Archaeological Ruins of Liangzhu City
- UNESCO·ICOMOS, Archaeological Ruins of Liangzhu City Nomination and Evaluation Documents
-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량주 고대 수리 시스템 연구
-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량주 건축기술과 노동조직 연구
-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Engineering Liangzhu: Mounds, Waterways, and Social Complexity
- Quaternary Research, 장강 삼각주의 환경 변화와 량주 도시 형성 연구
- Quaternary Science Reviews, 량주 말기 해안 침수와 환경 변화 연구
- Antiquity, 장강 하류 문화 연대와 량주 이후 문화 연구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Liangzhu Jade Cong·Bi 자료
- The British Museum, Liangzhu Jade Cong·Bi Collection 자료
FAQ
Q1. 량주 고성은 중국 최초의 도시인가요?
량주를 단순하게 ‘중국 최초의 도시’라고 단정하는 것보다는 중국과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대규모 도시문명 사례 가운데 하나라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같은 시기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도 복잡한 취락과 정치조직이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량주는 도시계획·대형 토목시설·수리체계·사회계층을 한꺼번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Q2. 량주 문화에서 옥종은 무엇에 사용됐나요?
옥종은 량주 상위계층 무덤에서 많이 발견되는 대표적인 의례용 옥기입니다. 사회적 신분이나 종교적 권위를 나타냈을 가능성이 크지만 량주 시대에는 해독 가능한 문자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정확한 의미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후대 중국의 해석을 그대로 신석기시대 량주에 적용하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Q3. 량주 문명은 홍수 때문에 멸망했나요?
홍수와 해수면 변화, 기후 변동이 량주 문화 쇠퇴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연구가 있습니다. 특히 약 4300년 전 전후로 강수량 증가와 침수 흔적이 확인됩니다. 그러나 사회 내부 변화나 장기간의 환경 변화 등 다른 요인도 거론되므로 ‘대홍수 한 번으로 멸망했다’고 단정하기보다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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