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커우 문화|산둥 신석기 묘지와 부장품으로 읽는 계층 분화의 시작

다원커우 문화

약 5,000~6,000년 전 중국 산둥 지역의 한 공동체에서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시신을 땅에 묻었지만 모두를 똑같이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무덤에는 몇 점의 토기만 들어갔고, 어떤 무덤에는 수십 점의 토기와 옥기, 상아제품, 돼지뼈까지 함께 놓였습니다. 무덤의 크기와 구조도 달랐습니다.

문자가 없던 시대라 당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회를 어떻게 설명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무덤은 꽤 많은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누가 더 많은 물건을 가졌는지, 어떤 사람이 특별한 의례를 받았는지, 공동체 안에서 부와 권위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었는지를 고고학적으로 추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문화가 바로 다원커우 문화(Dawenkou Culture, 大汶口文化)입니다.

다원커우 문화는 흔히 중국 산둥 지역의 대표적인 신석기 문화 가운데 하나로 소개됩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 문화가 중요한 이유는 예쁜 토기나 옥기를 남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비교적 평등했던 초기 농경 공동체가 점차 사회적 위계와 계층 분화, 의례적 권위, 전문 생산과 장거리 교류를 갖춘 복합사회로 이동하는 과정이 무덤과 유물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후기 다원커우 사회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변화는 이후 산둥의 룽산 문화(Longshan Culture)를 이해하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됩니다.


다원커우 문화란 무엇인가

다원커우 문화는 중국 신석기시대 후기에 산둥을 중심으로 발전한 고고학 문화입니다. 중심 지역은 오늘날의 산둥성이지만 그 영향권은 북부 장쑤와 안후이 일부까지 확장되어 있었습니다.

연대는 연구자와 편년 체계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기원전 약 4300~2600년 전후로 봅니다. 중국국가박물관은 주요 다원커우 유물을 기원전 약 4200~2500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원커우라는 이름은 산둥성 타이안 일대의 다원커우 유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다원커우 문화를 연구할 때는 다원커우 유적 하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오자(Jiaojia), 산리허(Sanlihe), 량왕청(Liangwangcheng), 왕인(Wangyin), 푸자(Fujia) 등 여러 유적을 함께 비교합니다.

구분대략적인 시기주요 변화
초기기원전 약 4300~3500년농경 정착생활 확대, 비교적 제한적인 무덤 격차
중기기원전 약 3500~3000년부장품 증가, 토기 제작 기술 발전, 사회적 차이 확대
후기기원전 약 3000~2600년대형묘·목관·다량 부장품·옥기 등 위계 표현 강화
이후기원전 3천년대 후반 이후산둥 룽산 문화의 사회복합화로 연결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 연도 하나가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물질문화에 더 분명하게 표현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다원커우 이전과 무엇이 달라졌을까

다원커우 문화가 갑자기 계급사회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 이전 산둥 지역에도 농경과 정착생활, 토기 생산, 공동묘지 등이 존재했습니다. 다원커우 시대에 들어오면서 달라진 것은 공동체 내부의 차이가 점점 더 눈에 띄는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특히 고고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이 묘제(墓制)입니다.

신석기 유적에서 주거지만 살펴보면 누가 공동체에서 높은 위치에 있었는지 알아내기 쉽지 않습니다. 집이 사라지거나 여러 차례 재건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무덤은 다릅니다.

무덤의 크기,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력, 관의 사용 여부, 부장품의 종류와 수량, 희귀한 원료의 존재 등을 비교하면 공동체 내부의 사회적 차이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원커우 연구에서 mortuary archaeology, 즉 묘장고고학이 매우 중요합니다.


무덤이 보여주는 다원커우 사회의 계층 분화

다원커우 문화 후기 무덤들을 보면 사람마다 장례 대우가 상당히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의 무덤은 단순한 토광묘이고 부장품도 많지 않습니다. 반면 일부 무덤은 훨씬 많은 노동력을 들여 조성되었고 목관이나 별도의 공간 구조가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부장품의 차이는 더욱 뚜렷합니다.

토기 몇 점만 묻힌 무덤이 있는 반면 상당히 많은 토기와 석기, 옥기, 상아제품, 동물뼈가 함께 발견되는 무덤도 있습니다.

워싱턴대학교의 중국문명 자료가 소개하는 다원커우의 한 부유한 무덤에서는 토기와 뚜껑 94점뿐 아니라 옥제품, 석제품, 상아제품, 돼지 관련 유물 등 매우 많은 부장품이 확인되었습니다. 같은 묘지에서도 부장품이 한두 점뿐인 무덤부터 수십 점 이상의 유물이 들어간 무덤까지 큰 편차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단순한 장례 취향 차이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무덤에서 확인되는 사회적 차이

고고학적 요소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
무덤 크기투입된 노동력과 장례 규모
목관·목곽 사용장례 비용과 특별한 대우
토기 수량재화 축적 및 의례 규모
옥기·상아 등 희귀품교환망과 권위
돼지 하악골·돼지뼈식량 자원, 연회 또는 부의 과시
정교한 의례용 토기의례적·사회적 지위
희귀 안료교역과 특별한 장례 대우

다만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부장품이 많다고 곧바로 현대적인 의미의 ‘귀족’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연령이나 성별, 개인의 생전 업적, 가족집단의 위치, 의례적 역할 등 여러 요인이 동시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후기 다원커우 사회를 분석한 연구에서도 사회적 차별화가 증가한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유적에서 동일한 위계질서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돼지뼈는 왜 무덤에 들어갔을까

다원커우 문화에서 흥미로운 유물 중 하나가 돼지뼈, 특히 돼지 머리나 하악골입니다.

오늘날 관점에서는 무덤 속 돼지뼈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석기 농경사회에서 가축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돼지는 키우는 데 시간과 사료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많은 돼지를 보유하거나 소비할 능력은 일정한 경제력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다원커우 문화의 돼지 사육을 안정동위원소 분석으로 연구한 결과도 돼지가 이 문화권의 생계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보여줍니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중심 지역에서는 돼지의 비중이 상당히 컸고, 일부 돼지는 조·기장이나 쌀 같은 재배작물 부산물을 먹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돼지뼈가 무덤에 들어간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설명 가운데 하나는 돼지가 일종의 prestige economy, 즉 위신재 경제와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돼지를 보유한 사람이 공동체 구성원을 초대해 대규모 연회를 열었다면 음식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만드는 수단이 됩니다.

“저 사람의 장례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먹었다.”

이런 경험 자체가 해당 가족이나 집단의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돼지뼈와 높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다른 부장품 사이의 관련성을 분석한 연구 역시 돼지의 소유와 소비가 다원커우 사회에서 부와 권위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한줄팁

다원커우 무덤의 돼지뼈는 단순한 음식쓰레기가 아니라 ‘누가 더 많은 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사회경제 자료로 보는 것이 핵심입니다.


옥기와 상아제품이 의미하는 장거리 교류

다원커우의 계층 분화를 이해할 때 토기 숫자만 세어서는 부족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재료가 사용되었느냐입니다.

옥이나 상아처럼 구하기 어려운 재료로 만든 물건은 평범한 생활용품과 성격이 다릅니다.

일부 다원커우 무덤에서는 옥제 장신구뿐 아니라 상아제품처럼 제작 과정이 복잡한 물품이 확인됩니다. 모든 무덤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무덤에 집중되는 경향도 나타납니다.

이런 물건은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문 생산(craft specialization)입니다.

정교한 옥기를 만들려면 원석을 자르고 갈고 구멍을 뚫고 연마하는 상당한 기술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틈틈이 만드는 수준을 넘어 특정 기술을 가진 제작자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장거리 교환망(long-distance exchange network)입니다.

모든 지역에서 옥과 희귀한 원료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특정 가족이나 집단이 이런 물품을 지속적으로 확보했다면 단순히 물건을 많이 가진 것을 넘어 다른 공동체와 연결된 사회적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원커우 시기의 일부 옥기가 남쪽 계통의 양식적 특징을 가진다는 연구도 있어 산둥의 신석기 공동체들이 생각보다 넓은 교류망에 참여했음을 보여줍니다.


토기가 생활도구에서 권위의 상징으로 변하다

다원커우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은 역시 토기입니다.

적색토기뿐 아니라 흑도, 백도, 채도 등 다양한 도기가 나타나며 삼족기, 높은 굽이 달린 그릇, 주전자 형태의 기물 등 상당히 복잡한 형태도 제작되었습니다.

특히 백도(白陶)가 눈에 띕니다.

중국국가박물관이 소장한 다원커우 문화 백도 귀(gui)는 카올린 계열 점토를 이용해 약 1,200℃에서 구워낸 것으로 소개됩니다. 벽이 얇고 단단하며 제작 난도가 높아 일반적인 일상용기보다는 중요한 의례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여기서 사회의 변화가 보입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음식을 담을 그릇 하나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누가 어떤 그릇을 사용하고, 어떤 의례에서 그것을 보여주느냐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합니다.

실용성을 넘어 상징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특히 다원커우 후기의 복잡한 토기 제작은 이후 산둥 룽산 문화의 정교한 도기 기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됩니다.


자오자 유적에서 발견된 ‘큰 마을’ 이상의 사회

다원커우 문화 연구에서 최근 특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곳이 산둥성 지난 일대의 자오자 유적(Jiaojia Site)입니다.

이곳에서는 다원커우 문화 중·후기에 해당하는 취락과 무덤뿐 아니라 성벽과 해자, 건축 흔적, 대형 무덤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고급 토기와 옥기 등이 함께 출토되어 단순한 소규모 농촌 취락과는 다른 성격을 보여줍니다. 중국국가박물관은 자오자를 당시 산둥 북부에서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중요한 대형 중심 취락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어린 사람의 무덤입니다.

최근 자오자 유적 인골과 장례문화를 분석한 연구에서는 13~15세 정도로 추정되는 한 인물이 관과 함께 묻혔으며 옥팔찌·귀걸이 등을 포함해 약 60점의 부장품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고합니다. 어린아이 무덤 중에서도 상당한 부장품을 가진 사례가 확인됩니다.

이것은 중요한 질문을 만듭니다.

만약 높은 지위가 개인이 평생 노력해 획득한 것이라면 어린 나이에 사망한 사람에게 왜 이렇게 많은 물건을 넣었을까요?

가능한 해석 가운데 하나는 가족이나 혈연집단의 사회적 지위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있었을 가능성입니다.

즉 계층 분화가 단순한 개인 능력의 차이에서 가족 단위의 지위 차이로 이동했는지를 검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코리의 중간생각

다원커우 문화를 살펴보다 보면 저는 무덤 안에 들어간 물건의 숫자보다 그 물건을 준비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궁금해집니다.
옥 하나를 만들기 위해 누군가는 오랜 시간을 들여 돌을 갈았을 것이고, 돼지를 부장하기 위해 누군가는 몇 달 또는 몇 년 동안 가축을 길렀을 것입니다.
그 많은 자원을 한 사람의 장례에 사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공동체 안에서 모든 사람이 같은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다만 무덤이 화려하다고 곧바로 왕이나 귀족이라고 부르는 것도 위험합니다.
다원커우의 재미는 바로 평등한 농촌 공동체와 본격적인 계급사회 사이에서 변화가 시작되는 순간을 볼 수 있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농사는 다원커우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을까

사회적 계층 분화의 바탕에는 안정적인 식량 생산이 있었습니다.

다원커우 문화권에서는 조·기장을 중심으로 한 잡곡 농업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지역에 따라 벼농사도 함께 나타났습니다.

최근 고고식물학과 토기 잔존물 분석에서는 북부 산둥의 다원커우 유적에서도 벼 소비 흔적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자오자 토기에서 진행된 미세식물 분석에서도 조·기장뿐 아니라 쌀을 이용한 흔적이 보고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원커우 문화권 전체가 동일한 농업체계를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산둥 중심부에서는 잡곡 농업이 중요했고, 남동부나 장쑤에 가까운 지역에서는 쌀의 비중이 커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지역마다 다른 농업 생산과 생태환경은 서로 다른 경제 기반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면 잉여가 생길 가능성도 커집니다.

잉여식량은 저장할 수 있고, 교환할 수 있으며, 사람을 동원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농업의 발전은 단순히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문제를 넘어 재산 축적과 교환, 의례, 권력 형성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여성의 지위는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다

과거에는 다원커우 후기로 갈수록 남성이 사회적 권력을 장악하고 부계사회가 형성되었다는 설명이 자주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 연구는 조금 더 복잡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량왕청 유적의 후기 다원커우 무덤을 분석한 연구에서는 일부 고령 여성들이 상당히 특별한 장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어떤 여성 무덤에서는 동부 중국에서 희귀했던 것으로 판단되는 주사(cinnabar) 계열의 붉은 안료가 사용되었고 많은 부장품이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안정동위원소 분석에서는 일부 여성들이 쌀과 육류를 포함해 상대적으로 다양한 식품에 접근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습니다.

따라서

“다원커우 후기가 되면서 남성이 모든 권력을 차지했다.”

라고 단순화하기는 어렵습니다.

산리허와 젠신에서는 후기 단계에 남성 무덤의 평균 부장품이 더 많은 경향이 관찰되지만, 량왕청에서는 일부 여성의 특별한 사회적 지위가 확인됩니다.

즉 당시의 사회적 정체성은 성별 하나가 아니라 연령·가족·경제력·의례적 역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부분이 최근 다원커우 연구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계층 분화와 국가 형성은 같은 말이 아니다

다원커우 사회에 계층 분화가 나타났다고 해서 곧바로 국가가 만들어졌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국가(state)가 성립하려면 정치적 지배조직, 영토 관리, 지속적인 권력구조, 조세나 공납과 같은 재분배 체계 등 훨씬 복잡한 조건을 검토해야 합니다.

다원커우에서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social differentiation, 즉 사회적 차별화입니다.

일부 사람이나 가족이 다른 구성원보다 더 많은 재화와 희귀품에 접근했고, 장례에서도 서로 다른 대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형 취락과 방어시설, 옥기와 특수토기의 생산, 장거리 교환망 등이 점차 결합합니다.

이러한 변화를 고고학에서는 흔히 사회복합화(social complexity) 과정으로 바라봅니다.

다원커우는 완성된 국가라기보다는 중국 동부지역에서 복합사회가 성장하는 중요한 단계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다원커우에서 룽산 문화로

다원커우 문화 이후 산둥 지역에서는 룽산 문화가 발전합니다.

룽산 문화에서는 취락 규모 차이와 중심지의 성장, 성벽을 가진 취락, 전문화된 생산, 사회적 위계 등이 더욱 뚜렷해지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후기 다원커우에서 이미 확인되는 몇몇 변화는 룽산 사회를 예고합니다.

옥기와 특수 토기의 등장, 무덤 규모 차이, 부장품 격차, 중심 취락의 성장, 교환 네트워크 확대 등이 대표적입니다.

실제로 자오자 유적 역시 다원커우에서 산둥 룽산 사회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그래서 다원커우 문화를 공부할 때는 독립된 신석기 문화 하나로만 보는 것보다,

베이신 문화 → 다원커우 문화 → 산둥 룽산 문화

라는 장기적인 변화 속에서 보면 훨씬 이해하기 쉽습니다.

평범한 농경취락에서 시작된 사회가 점차 부와 권위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그 차이가 장례와 물건, 취락구조로 표현되는 과정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원커우 문화가 중국 신석기 연구에서 중요한 이유

다원커우 문화의 중요성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계층 분화 과정을 구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무덤 크기와 부장품 격차가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비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의례와 경제의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돼지, 토기, 옥기 등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라 장례와 연회, 사회적 관계를 만드는 수단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셋째, 전문화와 교역의 확대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정교한 백도와 옥기 같은 물건은 숙련된 기술과 상당한 노동을 필요로 합니다.

넷째, 가족과 지위의 관계를 연구할 수 있습니다.

어린 사람의 화려한 무덤은 일부 사회적 지위가 개인의 성취만이 아니라 가족집단과 관계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원커우는 이후 산둥 룽산 문화에서 더욱 뚜렷해지는 사회복합화의 배경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다원커우 문화는 중국 신석기시대에서 평등한 공동체가 어떻게 점차 위계화된 사회로 변화했는가를 연구할 때 빠질 수 없는 문화입니다.


다원커우 문화의 계층 분화와 사회적 복잡화를 더 넓은 흐름에서 보면, 이는 산둥 지역만의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황허 유역에서는 양사오 문화와 룽산 문화가 발전했고, 다른 지역에서도 서로 다른 농경·정착 문화가 성장하면서 중국 선사사회 전체가 점차 복잡해졌습니다.

따라서 다원커우 문화가 어떤 역사적 위치에 있었는지 더 깊이 이해하려면  「중국 선사 인류 정착과 황하 문명 기원: 양사오·룽산 문화로 읽는 신석기 혁명」  을 함께 살펴보면 좋습니다. 중국 문명이 하나의 지역에서 갑자기 탄생한 것이 아니라 여러 신석기 문화권의 교류와 경쟁, 농경 확산이 오랜 시간 축적된 결과라는 점이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코리의 생각

다원커우 문화를 단순히 “산둥에서 발견된 오래된 신석기 문화” 정도로 기억하면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제가 보기에는 다원커우 문화의 핵심은 차이의 등장입니다.

같은 공동체에서 살았지만 누군가는 단순한 무덤에 묻혔고, 누군가는 정교한 토기와 옥기, 희귀한 물품과 함께 묻혔습니다. 어떤 가족은 더 많은 가축과 물건을 동원할 수 있었고, 일부 중심 취락은 주변보다 훨씬 큰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시대를 곧바로 왕과 귀족이 지배하는 국가사회라고 부를 단계는 아닙니다.

오히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중간 과정입니다.

농업 생산이 늘어나고, 재산이 축적되고, 의례가 복잡해지고, 장거리 교환망이 만들어지면서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조금씩 커지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이후 룽산 문화의 더욱 복잡한 사회구조로 이어집니다.

결국 다원커우 문화는 중국 고대사를 왕조가 등장한 뒤부터 볼 것이 아니라, 왕조가 생겨날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신석기시대의 중요한 퍼즐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자료

  • 중국국가박물관(National Museum of China), 다원커우 문화 및 자오자 유적 자료
  • Dong Yu et al., Mortuary Ritual and Social Identities during the Late Dawenkou Period in China, Antiquity
  • Seung-Og Kim, Burials, Pigs, and Political Prestige in Neolithic China
  • Shandong University, Jiaojia Archaeological Site 연구자료
  • Anne P. Underhill 관련 중국 신석기 사회복합화 연구
  • 중국 고고학의 다원커우·룽산 문화 발굴 및 묘제 연구
  • Archaeological and Anthropological Sciences, Jiaojia Site 생애사·동위원소 연구

Q&A

Q1. 다원커우 문화는 어느 지역에서 발전했나요?

중심 지역은 현재 중국 산둥성입니다. 다만 문화적 분포는 산둥에만 한정되지 않고 북부 장쑤와 안후이 일부 지역까지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황허 하류와 중국 동부 신석기 문화권의 중요한 지역문화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Q2. 다원커우 문화에서 계층 분화가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가장 중요한 근거는 무덤의 차이입니다. 무덤의 크기와 구조, 목관 사용 여부, 토기 수량, 옥·상아 등 희귀품, 돼지뼈 같은 부장물에서 상당한 차이가 발견됩니다. 다만 이런 차이를 곧바로 왕·귀족·평민 같은 고정된 신분제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Q3. 다원커우 문화와 룽산 문화는 어떤 관계인가요?

산둥 지역에서는 다원커우 문화 이후 룽산 문화가 발전합니다. 후기 다원커우에서 나타난 사회적 위계, 중심 취락 성장, 의례용 토기와 옥기, 교역 확대 등이 룽산 시기에 한층 발전하기 때문에 두 문화를 중국 동부의 장기적인 사회복합화 과정 속에서 연결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원커우 문화   다원커우 문화의 무덤과 토기·옥기·동물 부장품은 산둥 신석기 사회에서 재산과 권위의 차이가 커지던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고고학 자료다.
다원커우 문화의 무덤과 토기·옥기·동물 부장품은 산둥 신석기 사회에서 재산과 권위의 차이가 커지던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고고학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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